2010년 8월 19일 목요일

지로와 돼지를 위한 인식표

지로와 돼지의 인식표

  최근 취한 이웃에게 몹시 맞고, 아파트 고층에서 집어던저져 죽은 불쌍한 고양이 은비 사건이나, 스스로 강아지를 기르면서 이웃의 고양이를 혐오해서 관리인을 시켜 고양이를 목매달아 매장한 고양이 샐리의 죽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도무지 남의 일 같지 않다.

  사고는 항상 방심하는 때에 생기고, 설마하는 부분을 파고든다. 강아지와 고양이는 세 살 배기 어린 아이와 같아서 본능의 충동을 저항하기가 힘들다. 중성화 하지 않은 고양이는 종족 번식의 본능으로 호르몬이 시키는대로 집을 나가고, 영역을 확장하려고 한다. 녀석들이 경계심이 강하고, 겁이 많은 고양이과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본능의 충동에는 저항할 수가 없다. 중성화를 하더라도 호기심만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저 문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 호기심과 불안은 기여코 녀석들로 하여금 안전한 집을 떠나도록 만들고 만다.

  고약한 성질을 가진 인간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녀석들의 충동으로 부터 최소한의 기댈 부분이 있다면 바로 목줄과 인식표이다. 목줄은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이란 걸 증명하고, 인식표는 행여나 길을 잃었을 때 마음씨 착한 사람의 선의를 기대할 수 있게 해준다.

  지로와 돼지를 가족으로 들인지 일년이 다 되어가는데. 개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목줄을 고양이는 오죽할까, 하는 마음에 인식표를 다는 것을 미루고 미뤄왔는데.  몇일전, 남이섬 주차장에서 보았던 버려진 동물들을 보니 마음이 짠해져 미루던 결정을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남이섬 주차장에 버려진 믹스견. 주인을 찾느라 눈물이 그렁그렁 했었다.





지로와 돼지의 오붓한 한때. 돼지의 뒷발이 지로의 좋지 못한 곳을....

  인식표를 만드는건 의외로 복잡했다. 그냥 이름만 쓰면 되는게 아니라, 녀석들의 성별, 생년월일, 주소 또는 간단한 글 같은걸 적어야 하는데. 성별이야 두 녀석 모두 중성화한 수컷이긴 한데 생년월일이 문제였다. 지 애비를 모르는 돼지 녀석은 갖 3개월에 접어드는 녀석을 지난해 10월에 데리고 왔다. 대충 석달 빼면 잘해봐야 1~2주차 정도로 09년 7월생으로 세이프. 문제는 업어다 온 지로녀석이다.

그래서 불만있냐는듯, 쳐다보는 지로. 이 놈 날이 갈 수록 뻔뻔해진다.
  작년 추석 전에 지인이 주차장에 이동장에 들어간 채 버려진 녀석을 데리고 와 나한테 오게 된 업둥이인데. 이 녀석의 과거는 버려진 이동장 말고는 모든게 불명. 태어난 날도, 전주인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건 중성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 이빨 관리를 받지 않아 치석이 끼고, 어금니 끝이 조금 깨져있는 것 정도. 이빨 상태로 보면 잘해봐야 2~3살인데 정확한 나이는 알 도리가 없다. 나라고 해서 좋은 주인집사는 안되겠지만. 중성화도 안시키고, 이빨도 안닦인 전주인과 3년이나 살았다면 억울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자르고 잘라서 2살로 치기로 했다. 그것도 빠른 2살. 데려온 10월을 생일로 치고 빠른 2살로 쳐서 08년 10월로 결정. 사실은 그 보다 한두해는 더 나이를 먹었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내 새끼인데.

  동물을 기르는 사람이 아니면 웃어넘기거나 한심해보일 고민을 하며 생년월일을 정하고 나니 또 하나의 난관이 생겼다. 바로 표시 문구. 원래는 주소를 쓰는 곳인데 월세살이를 하는 부평초같은 인생이라 주소를 쓸 수는 없어서 문구를 넣기로 했다.

  "하늘땅 별땅. 제일 이쁜 내 새끼 돼지"

사실 울 돼지가 이쁘긴 이쁘다. 이래뵈도 사진전에도 나간 명품똥고양이.

  같은 손과 발이 나란히 로그아웃 할 것 같은 문구를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인식표의 목적 - 고양이가 집을 잃을 경우 발견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을 적어야 할 것 같은 실용의 덫 때문에 오글거리는 문구는 쓸 수 없었다.

  돼지는, "온순하고 활발합니다" 라고 쓰고 지로는 "낯선 사람을 경계합니다" 로 결정.

  사실 돼지는 나이가 들면서 새침해진데다 안기거나 속박받는걸 싫어하는 고양이다운 성격이 되버렸지만. 놀이를 좋아하고 사람을 해하지 않으니 온순하다고 적었다. 지로는 다소 낯을 가리는데다, 사납기까지 해서 낯선 사람에겐 발톱을 꺼내곤 하니 발견자를 위한 경고의 문구.

  써놓고 보니 내 새끼 흉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과연, 이것이 실용의 덫인가....

으이그 못난 놈들

  이튿날, 인식표가 도착하고 녀석들에게 달아줬다. 의외로 싫어할 것 같은 지로는 별 신경 안쓰고 달고 다니는데 대범한 돼지 녀석이 오히려 신경쓰여 한다. 조금 불편하고, 신경쓰이겠지만 얼른 익숙해져서 인식표를 잘 차고 다녀주면 좋겠다. 사료값은 못 벌어다 줄 망정, 괜히 어디 가서 잃어버리지나 않게.

돼지는 목걸이가 좀 불편한 것 같다

어색해도 참아야지. 보기 좋으니 주인은 좋다.

신경쓰이니 때 달라고 하는 것 같다. 안된다 이놈아.


오히려 걱정했던 지로는 대범하다. 사실 털에 묻혀 인식표가 보이지도 않는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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